4월 6일(2부) 비싼 향유를 붓게 하는 힘 | 김종윤 목사 | 2025-04-0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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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개신교 한국선교가 첫발을 내딛은지 14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오직 복음”이라는 믿음으로 사회적 약자와 소외된 이들을 향한 헌신으로 근대의 민주주의와 시민사회의 일원으로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도록 이끌었던 선교초기의 정신과 자세를 다시금 되돌아보고 회복하고자 4월의 첫 주일을 기념주일로 지키게 되었습니다. 그동안의 한국사회에서 교회가 감당했던 긍정적인 역할에 대해서도 자부심을 갖게 되지만 지금은 자축이 아닌 자성을 먼저 해야 할 때입니다. 어떻게 하면 오늘 우리는 신앙의 기본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요?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어드렸던 사건을 묵상하며 우리가 회복해야 할 힘이 무엇인지 생각하려고 합니다. ∙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 새 – 받은 은혜를 기억하는 사람이 향유를 붓습니다. . 향유란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개 조금만 가지고도 진한 향기를 남기기에 아주 조금씩 찍거나 뿌려서 쓰는 것이 통례입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았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그녀의 행동은 그곳에 있던 많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을까요? 본문은 그 자리에서 예수를 위한 잔치가 열리고 있었다고 소개합니다. 병으로 죽었던 나사로를 나흘만에 다시 살리신 주님을 기억하며 마리아는 자신이 가진 최고의 것을 내어 드린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받은 은혜를 기억하는 사람이 향유를 붓습니다. ∙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 은혜를 모르면 계산부터 하기 시작합니다. 마리아가 한 일로 인하여 온 집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게 되었을 때 가룟유다는 그렇게 값비싼 향유를 낭비한 것을 두고 한마디 했습니다. 차라리 그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서 당장 먹을 것이 없어 힘들어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라도 나누어 줬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거지요. 언뜻 들으면 가룟유다의 말은 한순간의 감정으로 그 비싼 향유를 없애버린 마리아보다는 훨씬 더 설득력있게 들립니다. 하지만 이는 지나치게 계산적인 생각이었습니다. 더욱 가룟유다는 그런 사건을 가능하게 했던 은혜에 대해서는 조금도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은혜를 모르면 언제나 계산부터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런 계산의 결과를 결코 넘어설 수 없게 되고 맙니다. 하지만 은혜란 그렇게 계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 은혜를 따르게 되면 의미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습니다. 정작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마리아를 위하여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마리아가 했던 향유를 부어드린 일을 곧 있을 주님 자신의 고난과 장례를 위한 헌신으로 여기시겠다고 하는 이 말씀은 은혜를 따르게 되면 그 일에 대한 평가와 의미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고 하는 것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문제는 드러난 사건이나 보인 행동이 아니라 그런 사건과 행동을 하게 한 것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비슷한 일을 한다고 해도 은혜에 따라 한 것이 아니라면 자신과 함께 성령을 속인 일이 될 뿐입니다. 그렇게 하면 그 안에는 풍성함이 아니라 인색함만이 남게 됩니다. 낭비처럼 보이는 일도 거룩하게 하는 힘은 그 안에 가득찬 은혜 때문입니다. 정말 문제는 은혜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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