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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월 14일 실족하지 않는 기다림을 위한 지침 | 김종윤 목사 | 2025-12-1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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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생각해 봐도 대림절로 한 해의 마지막을 정리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귀하고 복된 일입니다.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과 감정에 휘둘리기 쉬운 시기를 준비와 기다림이란 주제로 훈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광야라고 할지라도 준비하면 얼마든지 새로운 길이 열리고 새역사가 시작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들을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기다림의 시간입니다. 기다림이란 단순히 일정한 시간이 흘러가길 참고 있는 수동적인 상태가 아닙니다. 기다림의 시간은 하나님이 우리를 골탕 먹이는 시간이 아니라 축복을 담을 그릇을 키우는 시간입니다. 따라서 기다리는 시간은 단순하게 멈춰있는 것이 아닌 가장 정밀하고 활발하게 일어나는 역동적인 시간입니다. 하지만 의미있는 기다림이 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 기다리는 것이 어려운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에는 세례요한이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몇 가지를 물어보는 내용이 소개됩니다. 놀라운 사실은 메시아의 길을 그토록 헌신적으로 예비했던 세례요한이 흔들리고 있는 모습을 보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기다림의 위기와 역설은 어디서부터 오는 걸까요? 아마도 환경적인 요인도 무시할 수는 없을 겁니다. 감옥이란 여러 가지 면에서 불편하고 어렵고 힘들었던 곳입니다. 하지만 세례요한을 힘들게 한 것은 따로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기대하고 생각했던 일들이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믿음의 부족이 아닙니다. 기대했던 메시아 상과 현실 속 예수님의 사역 사이에 있는 불일치가 그를 힘들게 하고 있었습니다. 기다림에 지친 이들이 하나님의 타이밍과 방식을 자신의 프레임에 가두려고 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알리라 – 어렵고 답답할수록 붙들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기다림에 지쳐서 거의 실족한 세례요한에게 주님이 하신 대답은 무엇입니까? 언뜻 생각하면 궁금해하는 것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이 좋을 듯합니다. 하지만 의외로 예수님은 세례요한이 보낸 제자들에게 돌아가서 요한에게 너희가 듣고 보는 것을 알리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하시면서 주님이 말씀하신 중요한 원칙이 있습니다. 내가 바라고 원하는 감정적인 차원에서의 해결이 아니라 약속된 말씀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성취되고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객관적으로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기다림이 고통스러울 때일수록 자기 문제에만 집착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루시고 계신 작은 일들에 시선을 돌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자신이 받았던 소명을 다시 돌아보면서 자신이 감당해야하는 역할을 재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 크고 작음보다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잘못된 기대는 그 자체만으로도 무엇보다 자신을 힘들게 합니다. 육체적 고통도 힘들지만 ‘인지부조화’(Cognitive Dissonance)에 따른 데이터와 현실의 차이는 우리를 꼼짝 달싹 할 수 없게 만드는 또다른 감옥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흔들리며 넘어졌던 세례요한을 비난하거나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라고 극찬에 가까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넘어짐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부끄러운 일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다시 일어서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때 중요한 것은 크고 작음에 대한 세상의 평가가 아닙니다. 주 앞에서 붙들어야 할 것은 크기(사이즈)가 아닙니다. 헛된 것에 사로잡히지 않을 때 넘어지지 않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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