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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3월 24일 주일2부예배 - 축제를 회복하라 | 김종윤목사 | 2019-03-2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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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마태복음22:1-14절 개역개정1.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이르시되 2.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3.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4.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르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5. 그들이 돌아 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6.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 7.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8.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 9.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대 10.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11.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12.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13.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축제를 회복하라
최근들어서 지역마다 특색을 살린 각종 축제들이 한창입니다. 물론 그런 축제들 가운데에는 대개의 경우 경제적인 수입을 창출하기 위한 인위적인 축제들도 많이 있습니다. 축제라는 이름으로 치러지는 대자연을 향한 인간들의 무지막지한 황포를 지적하는 소리들도 있지만 아직까지 이런 저런 이름들로 치러지는 그런 축제의 문화를 쉽게 포기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하지만 일상의 의미를 올바로 찾지 못하면 결국 그런 인위적인 축제를 통해서도 삶의 의미를 찾기는 결코 쉽지 않음을 우리는 먼저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인들에게 있어서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신앙인들에게도 각종 절기로 대별되는 특별한 시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절기들은 여러 다양한 축제의 형태를 띄고 있습니다. 하지만 축제의 참된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서 우리가 힘써야하는 것은 평범한 일상에 담긴 비밀을 올바로 깨닫는 것입니다.
∙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 – 왜 그런 잔치를 벌이시는 걸까요?
어떤 면에서 보면 오늘의 본문은 그동안 우리가 살펴보고 있었던 앞전의 비유들과 이어지고 있는 측면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요청을 거절한 아들들의 모습을 그린 첫 번째 비유와 포도원 주인의 뜻을 외면했던 악한 농부들의 모습을 이야기한 두 번째 비유에 이어서 오늘 본문의 비유에는 잔치를 준비한 임금의 초청을 싫어했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비유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왜 그런 잔치를 벌이시는 것인가? 하는 부분입니다. 물론 대사를 치르면서 일가친척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에게 소식을 전하고 참석을 요청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봄철만 되면 날라오는 청첩장들은 사실 그렇게 썩 반가운 것만은 아닙니다. 그래서 더 고민이 됩니다. 왜 이런 잔치를 벌이시는 걸까요?
∙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 위기는 새로운 기회의 문을 엽니다.
풍성한 잔치를 위하여 정성스럽게 준비하고 하객들을 초청했지만 처음에 청함을 받았던 이들은 처음부터 오기를 싫어했습니다. 어쩌면 이 잔치는 처음부터 쉽게 성공할수 없는 위험을 안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니나 다를까 다시 잔치를 위하여 모든 것을 갖춘 다음에 오라고 했던 두 번째 초청에도 사람들은 시니통치 않은 반응을 보입니다. 자신들의 일에만 신경쓸뿐 무관심한 태도를 보입니다. 나아가 상황은 정성스럽게 초청하기 위하여 임금이 보낸 종들마저 함부로 대하고 모욕하며 죽임으로 극단적인 파국을 맞이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런데도 비유의 임금은 끝내 잔치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임금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 계획된 축제를 풍성하게 마치려고 합니다. 놀랍게도 위기는 새로운 기회의 문을 엽니다.
∙ 청함을 받은 자와 택함을 입은 자의 차이 – 일상의 축제를 회복하십시오.
처음 초청받았던 사람들의 거절로 인하여 잔치의 문은 생각하지도 못했던 이들에게 새롭게 열립니다. 이정도로만 해도 충분한 메시지가 되었을 텐데 마태복음은 우리가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이름하여 예복의 문제입니다. 에복의 문제는 사실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흘러온 과정이 에복이라고 하는 것까지 챙길만큼 넉넉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본문의 비유는 손님들을 살피러온 임금을 통하여 직접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이 에복이 무엇을 의미하건 이는 결국 청함과 택함을 가르는 중요한 기준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일상의 축제를 회복하기 위하여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간직해야 하는 예복은 과연 무엇일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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