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7일 주일설교 | 김종윤 목사 | 2022-04-1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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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신앙은 육체적 생명이 끝난 후에도 다시 살아난다는 사실 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부활 신앙은 미래에 지속될 삶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살아야 하는 우리 삶과 더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생명은 세상의 악에 의해 소멸될 수 없다는 근원적인 사실을 믿을 때 우리는 시간의 공포를 견딜 수 있습니다. 부활을 믿는 이들은 패배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패배할지라도 하나님은 결코 패배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세상의 눈으로 보면 생명이 소멸하는 장소처럼 보였지만, 하나님 편에서 보면 새로운 생명이 시작되는 입구였습니다. ... 부활은 죽기 싫어하는 인간의 욕망 혹은 두려움이 하늘에 투사된 것이 아니라 참되고 실답게 살려는 인간의 용기있는 선택에 대한 하늘의 승인인 동시에 격려입니다. - 김기석『죽음을 넘어 부활을 살다』(두란노,2018) 중에서
∙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 무엇에 매이느냐에 따라 인생은 달라집니다.
당시 비울은 될 수 있는 대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이르려고 급히 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에베소도 들르지 않고 지나려고 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밀레도에서 에베소로 사람을 보내 교회의 장로들을 청했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정리해야할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정작 그들에게 하는 말을 곱씹어보면 그것은 그들만을 위한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다시 한 번 자신의 여정을 돌아보면서 견고하게 하기 위한 자리였습니다. 무엇에 매여서 살아야 하는 사람은 대개 불행합니다.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매여있는 인생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음을요.
∙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 두려운 것은 결박과 환난이 아닙니다.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던 바울에게는 고민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령께서 보이시고 알려주시는 미래가 그다지 낙관적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미래가 보장될 수 있다면 견딜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고 결박과 환난만 예상된다면 누구든지 염려할 수밖에 없고 머뭇거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이런 위험한 상황을 허락하실까요? 그런 애매하고 복잡한 상황을 통해서만이 배울 수 있는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은 우리를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앞에 있는 결박과 환난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것들에 사로잡혀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 마침의 은총을 구하십시오.
믿음이란 100% 다 알고 확인한 다음 작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은 충분하지 않고 확실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나아가기 위하여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믿고자 하는 의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로봇으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자유와 의지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때로 우리는 이런 자유와 의지를 감당하는 것조차 힘겨워합니다. 하지만 성숙을 위해서는 반드시 풀어야 하고 다루어야 할 부분이 바로 이러한 선택과 결단의 영역입니다. 바울은 마침내 다시 한 번 헌신을 선택하고 결심하고 있습니다. 시작도 어렵지만 마침을 위해서는 더욱 큰 은혜가 필요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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