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8일 2부 주님이 도전하신 생명의 가치 | 김종윤 목사 | 2025-09-2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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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이어서 우리는 ‘부자와 나사로’라고 알려진 비유의 말씀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의 비유 역시 잘 알려져 있지만 상당히 잘못 오해되어 사용되는 경우가 많은 비유 중의 하나입니다. 물론 어떤 말씀이든지 자기가 듣고 싶은 대로 듣고 마음대로 판단할 수 있지만 그런 식으로 말씀을 대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그 말씀에 담긴 참된 의미와 교훈을 얻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상대방의 말을 제대로 듣고 그 본래의 뜻과 의도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고 하고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하는 것은 소위 세상을 지혜롭게 산다고 하는 사람들의 특징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지혜가 아니라 하늘의 부르심을 따라 살기로 작정한 사람들은 듣고 싶은 것보다 들어야 하는 것에 보고 싶은 것보다는 보아야 하는 것에 더 주목해야 합니다. ∙ 한 부자와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 – 생명의 가치는 소유한 재물에 따라 평가되지 않습니다. 오늘의 비유를 보면서 우리가 생각하고 주목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주님은 오늘의 비유를 어떤 상황에서 또 어떤 의도로 말씀하고 있을까요?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는 어떤 의미에서 최소한의 정보만을 제공하면서 극단적으로 대비하고 있습니다. 한 부자는 최고의 상황에서 더할 나위 없는 삶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거지 나사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안타까운 현실을 마주하면서 안타까운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누가 보아도 이런 대비되는 삶은 다름 아닌 그가 지니고 있던 재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비유는 우리에게 생명의 가치는 바로 소유한 재물의 양에 따라 평가될 수 없음을 역설적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 영원의 가치는 지금 여기에 따라 결정되지 않습니다. 혹시 주님이 이 비유를 통하여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고 또 어떤 사람이 지옥에 떨어지는지 가르치려고 하시는 것으로 생각하시는지요? 하지만 아무리 기술된 비유의 내용을 분석하고 따져보아도 왜 부자는 음부에 떨어져서 고통을 받게 되었는지 그리고 거지는 또 왜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게 되었는지가 명확하지 않습니다. 이 비유는 바로 그런 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하신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극단적으로 절제된 비유 속에서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은 다른 데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생명의 가치를 담아내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삶과 죽음을 통하여 극단적으로 달라졌던 부자와 나사로의 형편은 우리에게 영원의 가치는 지금 여기에 따라 결정되지 않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 오늘 듣고 깨닫고 결단하는 것이 내일을 결정합니다. 비유 속에서 부자는 어느 시간이 되면 결코 어떤 것도 바꿀 수 없다고 하는 것을 처절하게 깨달아야만 했습니다. 아브라함도 말하고 있지만 결코 건너갈 수 없는 ‘큰 구렁텅이’가 그 사이에 놓여 있었습니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이미 이 큰 구렁텅이는 그들이 죽기 전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부자는 그 어려움 속에서 아직 살아있던 형제들이 자신과 같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도록이라도 해달라고 하면서 거지 나사로라도 다시 살아나게 해서 보내달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듣지 않는다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하면서 오늘의 비유는 끝이 납니다. 비유를 통하여 주님이 도전하셨던 생명의 가치는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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